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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6 좀더 양보할 수는 없을까?
  2. 2008/08/24 死 : sa ; 죽음
국가는 크게 2가지 방법으로 통치할 수 있다. 첫번째는 소수의 집단이 토론과 회의를 통해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강력한 지도자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장단점이 있어서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 국가와 시국에 따라 맞춰가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제다. 민주주의의 도입으로 과거 역사의 군주와는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지만, 그 애초의 틀은 과거의 모습과 비슷하다.

나는 대통령제를 찬성한다. 비록 단점이 수두룩 하고 때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성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국회에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면, 대통령제의 상황보다는 더 좋은 상황은 올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매일 국회 개점 휴업을 선언하고 서로의 타협점 보단 서로의 고집을 관철시키고 누구의 고집이 더 센가를 내기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과연 이들에게 국가의 주도권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제에 드는 안타까운 점이 하나있다. 이 제도에선 한사람의 능력에 대해 어쩌면 운에 맡겨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에 되는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 없는 것이다. 그 당사자는 자신의 신념과 소신대로 국정을 운영해 나가겠지만, 그의 본래의 의도는 결과적으로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지금 처럼 말이다.

"그의 시작은 선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결과는 아니지만, 시작은 긍정을 위해 나타났다는 의미다. 그 만큼 더욱더 자신의 선의를 검토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는 단지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받으려는 권리는 잠시 거두어 들여야 한다. 일거수 일투족이 신뢰와 연결되며, 자신감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편협한 시각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은 당연히 거부감과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거부감, 반대라는 것은 감정이다. 우선 시작은 감정적인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감정이 모이고 쌓이면 이성이 되고 결국 논리적으로도 비뚤어진 사회의 움직임이 생긴다. 비뚤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감정 당사자가 아닌 국가 정책이나 만족도에 대한 애초의 목표에서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나도 한 인간으로서 많은 욕심이 있다. 졸리고, 배고프고, 갖고 싶고, 원하는 바를 하고 싶다. 하지만 때론 그러한 것을 뒤로 하고 참는 것 역시 의미있는 일이란 것을 알았다. 10만원으로 사람의 마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의 생활의 어려움을 참고 쓰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사족하자면, 10만원을 직접적으로 줘서 즉, 돈을 주고 내 편인척 만드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상황에 따라 500원 혹은 1000원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경우는 많이 있다.)

갈등이 상존하고, 반목이 팽배한 곳에는 발전이 없다. 당연한 이치다. 그 경우엔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달려드는 하이에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헐뜯고 물어 뜯는 것의 결과는 피흘림과 상처뿐이다. 아무도 승리하지 않고 아무도 패배하지 않는다. 그저 상처만 남을 뿐이다. 무엇이 현명할까. 양보는 당장엔 패배처럼 보인다. 한발자국의 물러섬은 나의 자존심에 씻지 못할 오명을 남겨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좀더 냉정하게 생각하자. 웃으면서 갈등을 풀면 좀더 스트레스 없이 해결 할 수 있다. 서로 미안해하며 왜인지 모르는 뿌듯함으로 바꿀 수 있다.

국가는 전쟁터가 아니다. 국가는 톱니바퀴가 원할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윤활유다. 모두가 윤활유의 역할을 기대하는데 그 윤활유가 되려 톱니바퀴에 걸리는 쇳덩이처럼 활동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원할한 운영이 아니라 모두가 정지된 상처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였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는 태도보다는 내가 양보하면 상대방에게 양보를 요구하고 이해를 구하는 문화와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 먼저 양보하는 사람은 빛나는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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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6 01:03 2008/09/06 01:03
Posted by huk1984

死 : sa ; 죽음

사람아 2008/08/24 20:33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한줌의 가루로 돌아간다. 생명체, 움직임을 가지는 동물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또한, 삶의 주기를 갖고 인간이 명명한 사계절의 시간을 몇번 맞이하면 자연스럽게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그리고 섭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렇지만, 일정한 주기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위에서 그 주기에 턱없이 모자란 시간을 채우고 돌아가는 생명을 무수히 많이 볼 수 있었다. 각종 질병, 인간이 이기에 의해 만들어낸 도구로 인하여 제 자신의 주기를 못채우고 일찍 사라지는 경우가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난다. 비록, 그 때가 언제가 되었든간에 본질은 "결국 모든 것은 돌아간다"가 아닐까. 다만 시기가 문제일뿐.

정말 하기 싫은 이별은 산자에겐 크나큰 고통을 준다. 상실감. 바로 내 옆에 있었던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지금 이 시간에 내옆에 없거나, 없게 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상실을 느낀다. 비록 어릴때 보았던 친구와 헤어져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경우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스트레스와 상실로 다가온다. 어떤 일로 하여금 우리에게 그렇게 크게 느끼도록 하는 것일까. 단지 앞으로 절대 못보는 것과 어쩌면 볼 수도있다는 일종의 가능성을 두고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생각은 나로서로 잘 모르겠다. 아직은..

모든 종교는 죽음으로서 죄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계기로 본다. 죄라고 하면 기독교 적인 시각이지만, 불교 역시 고(苦)라고 하는 일종의 죄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고'를 없앨 수 있는 것. 증명을 하기란 불가능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경계를 다소 편안한 길로서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우리는 사회에서 취직과 가정과 편안한 노후를 위해 부딪히며 살아간다. 살기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살기위한 과정은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때론 많은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그 마찰은 우리가 범죄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경우다. 범죄와 도덕, 윤리 이 모든건 우리가 명명하고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구체화한 허구다. 실체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 죽음 역시 실체란 불명확하지만 존재하는 허구다.

뺨과 턱의 경계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도 모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 종교의 가르침처럼 죽음이 더 나은 곳일지도 모른다. 삶에서는 갈등과 욕심, 애정과 증오 등의 희노애락애오욕이 존재한다. 가져야 할 것에 부러움을 느끼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잃을까봐 걱정하고, 얻는것에 과욕한다. 이러한 경험을 거치면서 점차 남들에 어울리지 못하고 나 혼자만 살고 있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삶이든 죽음이든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나 스스로 그것이 최선의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애오욕 그리고 삶에서의 나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도덕도 인간이 만들고 명명한 것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고 남들의 이야기르 들으며 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우리 모두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죽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삶을 살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느껴볼 것이고, 마지막엔 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을 우리가 말로서 단어로서 명명한 한 가닥의 편집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설계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소로서 바라보는 것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한가닥의 위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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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4 20:33 2008/08/24 20:33
Posted by huk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