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한줌의 가루로 돌아간다. 생명체, 움직임을 가지는 동물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또한, 삶의 주기를 갖고 인간이 명명한 사계절의 시간을 몇번 맞이하면 자연스럽게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그리고 섭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렇지만, 일정한 주기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위에서 그 주기에 턱없이 모자란 시간을 채우고 돌아가는 생명을 무수히 많이 볼 수 있었다. 각종 질병, 인간이 이기에 의해 만들어낸 도구로 인하여 제 자신의 주기를 못채우고 일찍 사라지는 경우가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난다. 비록, 그 때가 언제가 되었든간에 본질은 "결국 모든 것은 돌아간다"가 아닐까. 다만 시기가 문제일뿐.
정말 하기 싫은 이별은 산자에겐 크나큰 고통을 준다. 상실감. 바로 내 옆에 있었던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지금 이 시간에 내옆에 없거나, 없게 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상실을 느낀다. 비록 어릴때 보았던 친구와 헤어져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경우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스트레스와 상실로 다가온다. 어떤 일로 하여금 우리에게 그렇게 크게 느끼도록 하는 것일까. 단지 앞으로 절대 못보는 것과 어쩌면 볼 수도있다는 일종의 가능성을 두고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생각은 나로서로 잘 모르겠다. 아직은..
모든 종교는 죽음으로서 죄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계기로 본다. 죄라고 하면 기독교 적인 시각이지만, 불교 역시 고(苦)라고 하는 일종의 죄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고'를 없앨 수 있는 것. 증명을 하기란 불가능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경계를 다소 편안한 길로서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우리는 사회에서 취직과 가정과 편안한 노후를 위해 부딪히며 살아간다. 살기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살기위한 과정은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때론 많은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그 마찰은 우리가 범죄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경우다. 범죄와 도덕, 윤리 이 모든건 우리가 명명하고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구체화한 허구다. 실체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 죽음 역시 실체란 불명확하지만 존재하는 허구다.
뺨과 턱의 경계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도 모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 종교의 가르침처럼 죽음이 더 나은 곳일지도 모른다. 삶에서는 갈등과 욕심, 애정과 증오 등의 희노애락애오욕이 존재한다. 가져야 할 것에 부러움을 느끼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잃을까봐 걱정하고, 얻는것에 과욕한다. 이러한 경험을 거치면서 점차 남들에 어울리지 못하고 나 혼자만 살고 있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삶이든 죽음이든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나 스스로 그것이 최선의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애오욕 그리고 삶에서의 나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도덕도 인간이 만들고 명명한 것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고 남들의 이야기르 들으며 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우리 모두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죽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삶을 살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느껴볼 것이고, 마지막엔 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을 우리가 말로서 단어로서 명명한 한 가닥의 편집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설계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소로서 바라보는 것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한가닥의 위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말 하기 싫은 이별은 산자에겐 크나큰 고통을 준다. 상실감. 바로 내 옆에 있었던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지금 이 시간에 내옆에 없거나, 없게 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상실을 느낀다. 비록 어릴때 보았던 친구와 헤어져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경우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스트레스와 상실로 다가온다. 어떤 일로 하여금 우리에게 그렇게 크게 느끼도록 하는 것일까. 단지 앞으로 절대 못보는 것과 어쩌면 볼 수도있다는 일종의 가능성을 두고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생각은 나로서로 잘 모르겠다. 아직은..
모든 종교는 죽음으로서 죄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계기로 본다. 죄라고 하면 기독교 적인 시각이지만, 불교 역시 고(苦)라고 하는 일종의 죄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고'를 없앨 수 있는 것. 증명을 하기란 불가능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경계를 다소 편안한 길로서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우리는 사회에서 취직과 가정과 편안한 노후를 위해 부딪히며 살아간다. 살기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살기위한 과정은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때론 많은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그 마찰은 우리가 범죄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경우다. 범죄와 도덕, 윤리 이 모든건 우리가 명명하고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구체화한 허구다. 실체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 죽음 역시 실체란 불명확하지만 존재하는 허구다.
뺨과 턱의 경계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도 모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 종교의 가르침처럼 죽음이 더 나은 곳일지도 모른다. 삶에서는 갈등과 욕심, 애정과 증오 등의 희노애락애오욕이 존재한다. 가져야 할 것에 부러움을 느끼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잃을까봐 걱정하고, 얻는것에 과욕한다. 이러한 경험을 거치면서 점차 남들에 어울리지 못하고 나 혼자만 살고 있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삶이든 죽음이든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나 스스로 그것이 최선의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애오욕 그리고 삶에서의 나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도덕도 인간이 만들고 명명한 것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고 남들의 이야기르 들으며 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우리 모두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죽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삶을 살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느껴볼 것이고, 마지막엔 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을 우리가 말로서 단어로서 명명한 한 가닥의 편집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설계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소로서 바라보는 것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한가닥의 위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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